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48리이고, 연풍현(延?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51리이고,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78리이고,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66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5리이고,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예속하였다.
현종(顯宗) 3년(1012)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만들었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만들었고, 고종(高宗) 41년(1254)에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세종(世宗)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산천: 대림산(大林山) :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오동산(梧桐山) :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악현(惡峴) : 주 서쪽 음성현(陰城縣) 경계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돌 길에 서성이니 하늘에 오르는 것 같은데, 게으른 종 입 벌리며 헐떡여 김 연기를 토한다. 올라 가서 머리 들고 바라보니 삼산(三山)이 오색 구름 가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 기쁘기도 하네." 하였다.
연주현(連珠峴) : 주 남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연주의 선녀가 풍류산(風流山)에 놀고 혹은 이 고개에서 놀았다." 한다. 그 골목의 이름을 지금까지 비선동(飛仙洞)이라고 일컫는다.
북진(北津) : 주 북쪽 1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금천(金遷) : 주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北津)의 하류이다.
월락탄(月落灘) :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주D-001이 놀던 곳이다.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금휴포(琴休浦) 어구에는 외로운 돛이 멀고, 월락탄(月落灘) 머리에는 흰 물결이 평평하다." 하였다.
달천(達川) :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주의 노군(奴軍)이 난을 일으키자 이자성(李子晟) 등을 보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토벌하게 하였다. 삼군이 달천에 이르러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한참 다리를 만들고 있는데, 적이 말하기를, "반역의 괴수를 베어 나와서 항복하려 한다." 하니, 자성(子晟)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너희들을 반드시 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자, 적이 괴수인 중 우목(牛木)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니, 관군(官軍)이 드디어 남은 무리를 사로잡아 모두 베었다.
진포(辰浦) : 곧 북진(北津)의 상류인데, 주 동쪽 15리에 있다. 맑고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는데, 세속에서 용못[龍淵]이라고 전한다. 하늘이 가물 때에 범의 두골(頭骨)을 던져넣으면 징험이 있다. 혹은 전회강(??江)이라고도 한다.
석심(石?). 신증 석류황(石硫黃) : 노오(老烏)ㆍ시물(柴勿) 두 골짜기에서 산출된다. 성곽 :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6백 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가운데에 우물 셋이 있다.
봉수 : 대림산 봉수(大林山烽燧) : 남쪽으로 연풍현(延?縣) 주정산(周井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심항산 봉수(心項山烽燧) :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오현(吾峴)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에 응한다.
마산 봉수(馬山烽燧) : 동쪽으로 대림산과 심항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가섭산(迦葉山)에 응한다.
망이성 봉수(望夷城烽燧) : 동쪽으로 음성현 가섭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진천현(鎭川縣) 소을산(所乙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경기 죽산현(竹山縣) 건지산(巾之山)에 응한다.
궁실 : 실록각(實錄閣) : 객관(客館) 동남쪽에 있다. 본조(本朝)의 실록(實錄)을 보관하고 있는데, 3년마다 사관(史官)을 보내 포쇄(曝?)한다. 성주(星州)와 전주(全州)도 같다.
○ 강희맹(姜希孟)의 기(記)에,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실록이 이루어지자 3건을 인쇄하여 지방 사고(史庫)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신(臣) 희맹을 보내어 충주와 성주에 봉안(奉安)하고, 지사(知事) 신 양성지(梁誠之)를 보내 전주에 봉안하게 하였다.
실록이 모두 71질인데 다섯 궤(?)에 나누어 넣어서 간직하는 일이 이미 끝났다. 희맹이 가만히 생각건대, 예부터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 천하 국가를 다스리매 그 광대 광명(廣大光明)한 체(體)와 성신 공화(聖神功化)의 묘(妙)가 곧 천지와 더불어 그 도량을 함께 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운행(運行)을 합하니 진실로 얕은 식견으로 그 가장자리조차 엿보기 어렵다.
그러나 천지의 변화를 궁구(窮究)하여 성인의 마음을 보는 것은 《주역(周易)》이 아니면 다할 수 없고 성인의 정치를 보아 성인의 마음을 보는 것은 전모(典謨)주D-002가 아니면 상고할 수 없으니, 이른바 전모는 바로 옛날의 실록이다.
당우(唐虞)로부터 내려와서 지금에 미치기까지 시대마다 각각 사적(史籍)이 있어서 실린 것이 실제 사적(史蹟)이 아닌 것이 없고 담겨 있는 것이 실제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백왕(百王)의 정치를 보고 백왕의 마음을 궁구하려고 하면, 이것을 버리고서는 의거할 데가 없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세조 대왕께서는 하늘이 내신 용맹과 지혜로써 빠진 것을 건져내고 어려운 것을 통하게 하여 집을 변화하여 나라로 만들었으니, 정일(精一)하여 중을 잡는주D-03 학문과 널리 베풀고 여러 백성을 구제[博施濟衆]하는 정치가 멀리 천고를 뛰어넘어 백왕의 으뜸이 되었으며, 예종대왕(睿宗大王)은 왕위(王位)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안일하게 놀지 못하였으니, 전후로 공적을 서로 이어 여러 세대 태평한 아름다움이 어찌 성왕(成王)과 강왕(康王)보다 많이 못하겠는가.
지금 사방 국경에 근심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베개를 편안히 하고 자며,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날마다 마시고 먹을 뿐이다. 어찌 두 성군(聖君)이 서로 이어 다스리고 하여 만든 것인 줄을 알겠는가. 그 정치 교화가 나온 곳을 궁구해 보면 또한 세조 대왕의 굳세고 강하여 해이하지 않은 묘(妙)함과 예종대왕의 공경하고 두려워한 부지런함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실록은 마땅히 이전(二典)ㆍ삼모(三謀)와 더불어 나란히 전하여 썩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 진(秦) 나라의 불꽃이 한번 타매 육경(六經)이 남은 것이 없고, 《상서(尙書)》 여러 편(篇)은 급군(汲郡)의 무덤주D-04과, 공씨(孔氏)의 벽중(壁中)주D-05에 감추어 둔 것에 의거하여 그 만분의 일이나마 보충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성조(聖朝)에서 사고(史庫)를 나누어 두어 실록을 봉안한 은미한 뜻이다. 뒤에 보는 자는 공경히 받들지어다." 하였다.
신증 남별관(南別館) : 서문(西門) 안에 있다.
신별관(新別館) : 남문 안에 있다. 누정 경영루(慶迎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동루(東樓)이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에, "충주는 남방의 요충지를 질러 막은 곳에 자리잡았다. 지역이 넓고 호구가 많으며, 이 때문에 공문서가 구름처럼 쌓이고 빈객이 모여들어서, 참으로 현명하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난 인재가 아니면 그 번잡한 것을 다스릴 수 없다.
사군(使君) 김중성(金仲誠)은 공신(功臣)의 후사(後嗣)로서 사무 처리의 재간이 능하여 사대부(士大夫)들의 추앙하는 바이다. 여기에 목사로 나온 지 3년 만에 정사가 이루어지고 백성이 화목해졌으며 온갖 폐지되었던 것이 모두 새로워졌다. 그를 보좌하여 다스린 사람은 황영(黃永)이다. 정통(正統) 임술년(1442) 가을에 지금 임금께서 대신을 보내 우리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경주(慶州)에서 받들어 맞이하는데 길이 충주를 지나게 되었다.
사군(使君)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조복(朝服)을 갖추고 고을 경계에 나가 맞이하였는데, 정청(正廳)이 낮고 누추하므로 객관 동쪽 누각에 모시고 엄숙하고 공손하게 우러러보며 향(香)을 올리고 네 번 절하고 물러났다.
이튿날 교외에서 공경히 전송하고 돌아와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어용(御容)이 잠깐 멈추신 것은 참으로 이 고을의 만나기 어려운 영광이니,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받들어야 한다. 이 고을이 세워진 지 가장 오래되어 삼한(三韓)이 반드시 다투는 땅이 되었고, 신라에 있어서는 한강군(漢江郡)이 되었고, 고구려에 있어서는 국원성(國原城)이 되었는데, 예전 누각이 좁고 기울어져 관부(官府)에서도 쉴 곳이 없다. 하물며 어용(御容)이 돌아오시는 날에 다시 여기에 모신다면 신자의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불안하다. 하자, 그렇다면 어째서 새롭게 하기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감사 이익(李益)과 박 도사(朴都事)와 강이(姜履) 군에게 아뢰었다. 이에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구어 산의 중 신정(信靖)이 그 일을 주간하고 고을 사람 민수(閔修)가 그 역사를 감독하여 한 달만에 공사가 끝나매, 이름하기를 경영루(慶迎樓)라 하였으니, 대개 어용을 받들어 맞은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예성(蘂城)은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이름난 땅, 앞에 다가서는 산 빛이 자리 구석에 들어온다. 바람과 달은 공부(工部 두보(杜甫))의 읊음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내와 산 모두가 망천(輞川)의 그림일세.주D-006 사람을 침범하는 서늘한 기운 은하수가 가까운 듯, 땅에 깔린 푸른 그늘 들새가 운다. 날이 다하도록 올라가 노는 무한한 뜻은, 석양이 점점 푸른 들로 내려오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진한(辰韓) 천 년의 국원(國原) 땅, 다시 층층 누각이 있어 동북 모퉁이를 눌렀다. 길은 옥구(玉鉤)로 나서 경계를 지었고, 땅은 금잔(金盞)을 나누어 그림을 이루었네. 웅풍(雄風)주D-07이 또 옷깃을 헤치고 받을 만하구나. 취한 글씨는 이마를 드러내고 부르짖는 것이 해롭지 않다. 서북으로 바라보니 어느 곳이 서울인가. 외로운 돛대 아득하게 푸른 들판에 닿았네."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땅이 감추고 하늘이 아끼는 별다른 땅, 대울타리 초가집이 성 모퉁이를 눌렀다. 사방 산의 경치는 멀리 보는 눈에 아득하고, 만 리의 곤붕(?鵬)은 장한 계획을 펴리. 버드나무 늘어선 큰 거리에는 버들개지 날아 어지럽고, 줄과 부들 낭떠러지 언덕에는 저녁 새가 부른다. 동풍은 봄빛이 늙는 것을 아끼지 않고, 쇠잔한 붉은꽃을 불어 흩어 푸른 들판 속에 점점하네." 하였다.
○ "사방 들판의 외밭이 토란밭에 닿았는데, 물은 맑고 모래는 희어 물고기가 환히 보이네. 낭간 대[琅?竹]는 바람 앞에 잎을 나부끼고, 수놓은 비단같은 산은 비온 뒤에 그림을 펼쳤도다. 백 묘(畝)의 벼꽃은 가을바람에 한들거리고, 만 가구의 등불은 취하여 환호한다. 태평하여 조세를 재촉하는 것을 보지 못하니, 짖는 개는 긴 털이 나고주D-08 길에는 풀이 가득하네." 하였다.
○ "구슬 꽃[雲]이 번쩍번쩍 온 지경에 일렁거리니, 백옥(白玉) 봉우리가 자리 모퉁이에서 솟아오르네. 나무에 가득한 찬 매화는 새로 꽃송이를 터뜨리고, 뜰을 침노하는 밝은 달은 그림을 이룬다. 천 개 항아리에 넘쳐 가득한 술을 탐스럽게 보고, 만 개 구멍이 휘몰아쳐 부르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르는 곳마다 임금의 은혜 깊기가 바다 같으니, 삼경(三逕)이 날마다 거칠어진들 혐의할 수 있으랴." 하였다.
○ 양희지(楊熙止)의 시에, "명리(名利) 길 10년에 구구한 포부, 중원(中原) 땅 한 모퉁이에 목사로 왔네. 관사(官舍) 버들은 푸른데 도령(陶令)주D-09의 집에 연했고, 촌락 꽃은 붉어서 망천(輞川) 그림에 들어온다. 진흙이 골목 어귀에 깊었으니 제비가 다투어 모이고, 해가 나루 머리에 저무니 사람들이 어지럽게 부른다. 벼슬 버리고 돌아갈 계책은 이루지 못하고 몸은 또 늙었는데, 고향 동산의 솔과 국화는 이미 거칠어졌으리." 하였다.
○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수려한 물 아름다운 산이 명승(名勝)의 땅 만들어, 만가(萬家)의 밥 짓는 연기 성 모퉁이를 덮었도다. 마루와 창은 사람이 신선의 집에 누워 있는 듯, 바람과 비는 하늘이 수묵화를 이루었다. 꽃 속에서 회포를 읊으니 봄새가 화답하고, 술 옆에서 잠이 드니 미인이 부른다. 번화한 신세가 도리어 우습구나. 시골 전원이 반은 거친 것을 어이하리." 하였다. 만경루(萬景樓) : 주 서쪽 3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만경(萬景)의 높은 누각 반공에 서 있는데, 올라와 보니 아름다운 흥치를 금하기 어렵구나. 달천(獺川) 푸른 물은 금탄(金灘)을 접하였고, 조령(鳥嶺) 푸른빛은 월악(月岳)을 연하여 높도다. 물결에 뜬 백구(白鷗)와는 맹서가 친숙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황학(黃鶴)은 부(賦)를 지어 부를 만하구나. 남북으로 보내고 맞는 일이 어느 때나 끝나리. 산은 스스로 푸르고 물은 스스로 아득하도다." 하였다.
공신루(拱宸樓) : 바로 성의 북문루(北門樓)이다.
남풍루(南風樓) : 바로 성의 남문루(南門樓)이다.
망경루(望京樓) : 객관 서쪽에 있다.
신증 청연당(淸燕堂) : 객관 동쪽에 있다.
○ 홍귀달의 기(記)에, "중원(中原)은 남북의 요충(要衝)이다. 서울에서부터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 물에 뜨고 육지로 달려 중원에 모여 길이 갈라져 두 고개(조령과 중령)를 넘어 이내 목적지에 도달하고,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가는 자도 또한 각각 두 고개를 경유하여 중원에 모여서 다시 물과 육지를 경유하여 서울에 도달하는데, 만일 남북의 손님이 서로 만나는 때를 당하면 관사(官舍)가 수용하지를 못하고, 본도(本道)의 세 사(使)는 벼슬이 높아서 품계가 같은데 혹 동시에 이르면 관사를 정해 대접하는 것이 실로 어렵다.
이것은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오래 불편하게 여기는 바였으나 당을 짓는 자가 없더니, 목사 최후(崔侯)와 통판(通判) 이군(李君)은 모두 당시의 어진 사람으로 뜻이 같고 기(氣)가 합하여 서로 더불어 백성에게 임하는 것이 도리가 있어, 지경 안이 흡연(洽然)히 따라서 감화되어 명령하는 대로 좇았다. 이에 비어 있는 땅에 터를 보아서 문의 동편에 들어가서 그 집을 높게 하여 연접시키고 칸수를 넓게 하여 청(廳)을 만드니, 여름에는 서늘한 마루가 있고 겨울에는 따뜻한 방이 있다. 손님이 오면 거닐고 편히 쉴 곳이 있고, 주인은 손님을 접대하고 정사를 할 곳이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된 뒤에 객사(客舍)가 비로소 부족하고 빠진 것이 없게 되었으니, 최후와 이군의 지어 만든 것이 보통보다 훨씬 뛰어난 줄을 알겠다. 준공이 된 뒤에 두 사람이 서울에 편지를 보내 나에게 누각에 대해 이름을 짓고 기를 짓기를 청하니, 내가 사양하다 못하여 말하기를, 중원은 산수의 뿌리이니, 천지의 맑은 기운이 여기에 모였다. 묵은 관사가 퇴락되고 새로 짓는 것이 이미 성취되었으니, 이에 천지의 맑은 기운이 산수에 붙여 있다가 이 누각이 뛰어나게 일어나고 단청이 휘황찬란해짐에 미쳐서는 산수의 맑은 기운이 모두 처마와 기둥 사이에 옮겨졌다. 여기에서 연회의 예를 행하거나 조용히 휴식할 수도 있고, 여기에서 문서를 정리할 수도 있으니, 청연(淸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공사가 4월에 시작하여 석달 뒤에 끝났으니 어찌 그리 빠른가.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6,7명을 부리는 것으로 충분하였으니 어찌 그리 간단한가. 최후의 휘(諱)는 인(潾)이요, 이후는 그 이름이 윤중(允中)이다." 하였다.
자경당(自警堂) : 객관 동쪽에 있다.
향사당(鄕射堂) : 서문 밖에 있다. 목사 이귀(李龜)가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 서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연원역(連原驛) : 주 북쪽 5리에 있다. 찰방(察訪)하는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14개인데, 단월(丹月)ㆍ인산(仁山)ㆍ감원(坎原)ㆍ신풍(新?)ㆍ안부(安富)ㆍ가흥(嘉興)ㆍ용안(用安)ㆍ황강(黃江) 수산(壽山)ㆍ장림(長林)ㆍ영천(靈泉)ㆍ오사(吾賜)ㆍ천남(泉南)ㆍ안음(安陰)이다.
○ 찰방 한 사람이다. 가흥역(嘉興驛) : 주 북쪽 30리에 있다. 용안역(用安驛) : 주 서쪽 45리에 있다. 예전에는 음성(陰城)에 속했는데, 성종(成宗) 9년에 본 주로 옮겨 붙였다. 단월역(丹月驛) : 옛날 단월부곡(丹月部曲)의 땅으로, 주 남쪽 10리에 있다. 역 남쪽에 계월루(溪月樓)가 있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술이 취하여 베개를 기대니 그림 병풍이 나직한데, 꿈을 깨니 앞 마을에 첫 닭이 운다. 문득 생각하니 밤 깊어 비 구름이 흩어질 제, 푸른 하늘 외로운 달이 작은 누각 서쪽에 있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부서진 병풍 외로운 베개에 짧은 촛대가 나직하고, 취(醉)한 것 덜 깨고 꿈은 날치는데, 벌써 새벽 닭이 운다. 아전이 오경을 알리기에 창을 밀치고 나가니, 반 바퀴 밝은 달이 늙은 오동나무 서쪽에 있네." 하였다.
건태원(乾兌院) : 주 서쪽 3리에 있다.
약옹원(若翁院) : 주 동쪽 25리에 있다.
경희원(慶希院) 주 남쪽 40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 주 서쪽 15리에 있다.
경제원(敬濟院) : 일명 대조(大棗)라고도 한다. 주 서쪽 30리에 있다.
우원(隅院) : 주 서쪽 65리에 있다.
도관원(都官院) : 주 서쪽 77리에 있다.
석원(石院) : 주 서쪽 85리에 있다.
금곶원(金串院) : 주 서쪽 10리에 있다.
주지원(注之院) : 주 남쪽 16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 주 서쪽 50리에 있다. 일명 광수(廣修)라고도 한다.
신창원(新倉院): 주 서북쪽 20리에 있다.
부구이원(釜拘伊院) : 주 서쪽 55리에 있다.
신증 금천참(金遷站) : 주 서쪽 15리에 있다.
가흥참(嘉興站) : 가흥역(嘉興驛) 옆에 있다.
창고 가흥창(可興倉) : 옛날에는 덕흥창(德興倉)이라 일컬었고, 또 경원창(慶原倉)이라 일컬었다. 가흥역 동쪽 2리에 있다. 예전에는 금천(金遷)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여기로 옮기고 경상도 여러 고을과 본주(本州)의 음성(陰城)ㆍ괴산(槐山)ㆍ청안(淸安)ㆍ보은(報恩)ㆍ단양(丹陽)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ㆍ진천(鎭川)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청풍(淸風)ㆍ연풍(延?)ㆍ청산(靑山) 등 고을의 전세(田稅)를 여기에서 거두어 배로 실어날라 서울에 이르는데, 수로(水路)로 2백 60리이다. 신증 예전에는 창사(倉舍)가 없었는데, 금상(今上) 16년에 비로소 집을 지었다. 모두 60칸이다.
신증 사창(社倉) : 주의 서쪽 80리에 있다. 불우 보련사(寶蓮寺) :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용두사(龍頭寺) :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가 지은 승 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 이숭인(李崇仁)이 송도생상인(送道生上人)시에, "개천(開天) 서쪽 억정(憶井) 동쪽에 높직하게 이 절이 있다. 산은 평야를 둘렀으니 새벽 구름이 희고, 강은 성긴 숲을 둘렀으니 단풍잎이 붉도다. 상인(上人)은 오늘에 돌아가는 돛대를 움직이고, 노는 손은 옛날에 울린 종소리를 들었노라. 동방(同榜)인 비서(?書)가 아마 잘 있을 것이니, 조만간 편지가 도달할 것이라 말하여 다오." 하였다. 개천사(開天寺) : 정토산(?土山)에 있다.
○ 고려(高麗) 역대 왕조의 실록(實錄)을 처음에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간직했다가 왜구(倭寇)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그 땅이 바닥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世宗)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이 권 사군(權使君)을 보내는 시에, "정토산이 대단히 좋다. 개천사가 징거할 만하네. 문에 이르는 이는 속(俗)된 손이 없고, 벽(壁)을 향한 이는 높은 중이러라. 백 척 높은 대(臺)는 물에 임하고, 천 년의 나무는 등넝쿨에 누웠다. 그대 돌아가 여가가 있거든 하나하나 찾아보소." 하였다. 영곡사(靈鵠寺) : 대림산(大林山)에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기대고 푸른 시냇물을 굽어보며 공중에 걸쳐서 누각을 지었다. 밑에서 바라보면 달아맨 것 같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천 길 바위 머리에 천년 묵은 절, 앞은 강물에 임하고 뒤는 산에 기대었다. 위로는 별(星)에 닿았으니 집이 세 뿔이 났고, 반쯤 허공에 솟았으니 다락 한 칸이로다." 하였다.
○ 고려 진화(陳?)의 시에, "이미 낭떠러지 구렁에 임하여 긴 소나무를 굽어보고, 다시 층층 사다리를 밟으며 여윈 지팡이를 짚는다. 도리어 우습구나, 노는 사람의 마음이 너무 조급하여, 한 번 와서 최고봉에 오르려 한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옛 절이 비고 서늘하여 땅에 먼지조차 없는데, 어느 해에 애써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무릅쓰고 집을 지었는고. 그림 누각은 그림자가 남호(南湖) 물에 떨어지고, 경쇠[磬] 소리 여운은 북령(北嶺) 구름에 묻힌다. 날이 따뜻하니 갈대 시내에는 고기가 떼를 짓고, 사람이 돌아가니 버들 물가에는 학이 줄을 지었다. 중을 향하여 세상일을 말하려 하니, 단정히 앉아 말없이 냉정히 듣지 않네." 하였다.
김생사(金生寺) : 북진(北津) 언덕에 있다. 김생(金生)은 신라 사람인데, 부모가 미천하여 그 세계(世系)는 알지 못한다. 경운(景雲) 2년(711)에 났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여 평생토록 다른 기예는 공부하지 않고, 나이 80이 넘었어도 오히려 붓을 잡고 쉬지 않아서, 예서(隸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지금도 가끔 진적(眞蹟)이 있는데, 배우는 자들이 전하며 보물로 여긴다. 숭녕(崇寧) 연간에 고려 학사(學士)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宋) 나라에 들어가서 변경(?京)에 머물 때에 한림 대소(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령(勅令)을 받들고 관사에 이르러 그림 족자를 썼다. 홍관이 김생의 행서ㆍ초서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 우군(王右軍 왕희지(王羲之))의 친필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하자, 홍관이 말하기를, "그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 우군을 제외하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으랴." 하였다. 홍관이 여러 번 말하였으나 끝내 믿지 않았다.
김생이 두타행(頭陀行)을 닦고 이 절에 있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을 삼았다. 덕주사(德周寺) : 월악산(月岳山) 밑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인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난초사(蘭草寺)ㆍ동가섭사(東迦葉寺) : 모두 가섭산(迦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주 북쪽 3리에 있다.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 : 견문산(犬門山) 밑 금휴포(琴休浦) 어귀에 있다.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실려 있다. 봄가을마다 향(香)과 축문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월악사(月岳祠) :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고려 고종(高宗) 43년(1256)에 몽고(蒙古) 군사가 주의 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山城)을 공격하니, 관리들이 늙고 약하여 막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산사로 올라갔는데, 홀연히 구름 안개ㆍ비ㆍ우레ㆍ번개가 크게 일어나자, 몽고 군사들이 신이 돕는 것이라고 여겨 치지 않고 물러갔다. 여단(?壇) : 주 북쪽에 있다. 총묘 권근(權近) 묘ㆍ권제(權?) 묘ㆍ권람(權擥) 묘 : 모두 주 서쪽 미법곡(彌法谷)에 있다. 정인지(鄭麟趾) 묘 : 주 남쪽 30리에 있다. 이극감(李克堪) 묘ㆍ손순효(孫舜孝) 묘ㆍ김예몽(金禮蒙) 묘 : 모두 주 북쪽 30리에 있다.
고적 익안 폐현(翼安廢縣)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주(本州)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 42년에 그 지방 사람들이 몽고 군사를 막아내어 공이 있으므로 승격하여 현(縣)을 만들고, 인하여 예속시켰다.
대림산성(大林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6백 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덕주산성(德周山城)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동악성(桐岳城) : 주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8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봉황성(鳳凰城) :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포모대(泡母臺) : 풍류산(風流山)에 있는데, 높이가 수십 장(丈)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적에 장미(薔薇)라는 선녀가 있었는데, 스스로 포모(泡母)라 이름하고 항상 그 위에서 놀아 향기가 골에 가득하였다.
당 명황(唐明皇)이 그 말을 듣고 도사(道士)를 보내 맞아서 궁에 들이고 정완부인(貞完夫人)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상고건대, 신라 성덕왕(聖德王) 22년(723)에 왕이 사신을 당(唐) 나라에 보내어 미녀 포정(抱貞)과 정원(貞?) 두 사람을 바치니, 현종(玄宗)이 말하기를, "여자가 모두 왕의 고모와 자매인데, 친속(親屬)을 떠나고 고국을 이별하였으니, 짐이 차마 머물러 둘 수 없다." 하고, 후하게 물건을 주어 돌려보냈다 하였으니, 정완(貞完)은 아마 정원(貞?)이 잘못된 듯하다. 그러나 향기가 골에 가득하였다는 말은 심히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탄금대(彈琴臺) :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단월부곡(丹月部曲) : 바로 단월역(丹月驛)의 옛터이다.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 : 주 동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사을미(沙乙未)라고 일컫는다. 탄촌부곡(炭村部曲) : 주 남쪽 20리에 있다.
이차탄부곡(伊次呑部曲)ㆍ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 : 주 남쪽 45리에 있다. 소잉림부곡(所仍林部曲) : 주 동쪽 65리에 있다. 청풍군(淸風郡)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간다. 덕산향(德山鄕) : 주 동쪽 55리에 있다. 청풍군 남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하맥곡처(下麥谷處) : 주 서북쪽 45리에 있다.
상맥곡처(上麥谷處)ㆍ연탄처(淵呑處) :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대조곡처(大鳥谷處) : 주 서쪽 90리에 있다.
原)의 수령이 되었다. 김양(金陽) :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중원 대윤(中原大尹)을 제수 하였다.
고려 김윤후(金允侯) :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한 지 70여 일이 되어 양식이 거의 다 되었다. 윤후가 사졸(士卒)들을 타일러 독려하기를, "만일 능히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하고, 드디어 관노(官奴)의 문서를 꺼내어 불사르고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대전하자 몽고 군사가 차츰 꺾여 마침내 다시는 남쪽으로 오지 못하였다.
이지명(李知命) : 판관(判官)이 되었다.
박항(朴恒) : 판관이 되어서 치적(治績)이 최고이므로 불러서 우정언(右正言)을 제수하였다. 김륜(金倫) : 목사(牧使)가 되었다. 황보항(皇甫沆) : 임춘(林椿)의 송행서(送行序)에, "내가 서울에 있으매 문을 막고 발을 늘어뜨리고 깊이 들어앉아 나가는 일이 적어서 드디어 사람들과 끊어졌으나, 그 나가고 처하는 것이 나와 어긋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나를 버리지 않는 이는 오직 안정(安定) 황보약수(皇甫若水)이다.
군은 학문을 널리 하고 그 뜻을 오로지 하며, 또 기억력이 강하고 문장이 호방(豪放)하다. 군의 곧음은 거문고 위의 줄이요, 군의 맑음은 갑 속의 거울이다. 선비로서 귀하건 천하건 어질건 어리석건 모두 군을 종유(從遊)하지 못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삼으니, 이것은 그 마음에 얻은 바가 과연 남과 다름이 있음이다. 이제 장차 조서를 받고 나가서 큰 번진(藩鎭)의 속관(屬官)이 되었다. 조정이 강좌(江左)의 지역으로 중요함을 삼으니, 그 징세(徵稅)를 완화하고 조세(租稅)를 개정하며 침체된 것을 진흥하고 간특한 것을 규찰하여, 가혹하게 거두고 독점하여 빼앗는 정사가 군으로부터 고쳐질 것이니, 이는 말할 것도 못 된다.
천자의 은택을 선양(宣揚)함으로써 한 방면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소리와 화한 기운을 소통시켜, 서늘한 바람이 되고 엉키어 단비가 되게 함으로써, 따뜻하고 빛나서 신작(神雀)과 영지(靈芝)의 상서가 모두 지경 안에 모이는 것을 내가 군에게 바라지 않고 누구한테 바라겠는가. 무릇 군을 교유하는 자들이 모두 군의 떠남을 아름답게 여겨 긴 말로 전별한다. 아, 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술(道術)에서 서로 잊나니,
내가 군과 더불어 도술의 강호에서 잊고 지낸 지가 오래인데도 이 작별에서 침묵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참으로 잊은 것인가." 하였다. 정책(鄭?) : 목사로 나와서 정치하는 것이 엄하고 밝아 아전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이순우(李純祐) :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충주 사록(忠州司祿)에 제수되었다. 최유청(崔惟淸)ㆍ최운해(崔雲海) : 모두 목사이다.
본조 정도전(鄭道傳) : 고려 공민왕 때에 충주 사록이 되었다. 심덕부(沈德符)ㆍ유구(柳?)ㆍ김사형(金士衡)ㆍ하자종(河自宗)ㆍ맹사성(孟思誠)ㆍ권진(權軫)ㆍ김담(金淡) : 모두 목사이다. 이사관(李士寬)ㆍ이익박(李益朴) : 모두 판관(判官)이다. 신증 정성근(鄭誠謹) : 목사가 되어 정사에 있어 청렴하고 신중한 것을 숭상하였다. 최린(崔潾) : 목사가 되어 치적(治績)이 최(最)임으로 당상(堂上)에 승진하였다. 박상(朴祥) : 목사가 되어 강직하고 밝게 정사를 하였다.